오늘의 문장

시애틀 코리안 북 소사이어티

글보기
제목시와 산책2026-06-25 22:47
작성자 Level 10

k262630212_1.jpg

한정원 지음, 시간의흐름, 2020


눈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는 나의 산책 동선은 직선이 아니다. 모든 방향을 만끽하고 싶은 나비처럼 나선을 만들며 움직인다. 그러니 산책 시간이 툭하면 길어지고 만다. 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 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방안에 있을 때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월러스 스티븐즈, '사물의 표면에 대하여')

정말 그것뿐이다.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 그 안의 무한 그리고 무. 나날이 성실한 산책자로 살아가지만, 나는 아직 언덕과 구름을 다 보지 못하고 있다. p.157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