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 읽을 책

시애틀 코리안 북 소사이어티

제목[읽은 책] 영화의 언어2026-06-14 18:10
카테고리읽은책 읽을책
작성자 Level 10

k802136416_1.jpg


뭔가를 새롭게 보거나 발견하게 해주는 게 좋아요. 늙음의 속성 - 모든 게 다 경험해본 것 같고, 어디서 본 것 같고, 그게 그건 거 같은 - 에, 갱년기의 우울과 의욕 저하 같은 게 겹쳐서 도통 사는 게 힘든 요즘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없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싶어서 책을 자꾸 보게 돼요. 드라마나 영화는 어디 자리 잡고 앉아서 봐야 하는 거라 들고 다닐 수 있는 책을 짬짬이. 그것들도 대부분 심드렁해요. 엄청난 콘텐츠 사용자인 이다혜 기자가 고전에 대한 책을 내고 영화에 관한 책을 이어 냈어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이 영화를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이 장면을 이렇게 느끼기도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대목이 많아요. 그래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느끼게도 되고요. 제가 혈기왕성했던 20대였던 90년대는 대중문화가 폭발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온갖 예술영화들이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었고 그런 영화를 보지 않으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보러 다녔어요. 마치 '뫄뫄뫄가 선정한 필독도서'를 의미도 모른 채 읽듯이요. 많은 영화들을 보다가 졸았고, 심각하게 본 영화들도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요.


어느날 아들이 묻더군요. "엄마, 엄마는 인생 영화가 뭐야?" 질문을 받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영화를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보았지, 당시 영화 덕후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영화를 보면서 혹은 스터디 같은 걸 통해서 익히는 '영화의 언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음을요. 이다혜 기자의 글은 전체를 보아야만 좋아요. 문장과 문장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만 들어내면 의미를 잃어버리거든요. 아들의 인생 영화 질문에 첫 번째로 튀어나온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였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따뜻함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저는 '걸어도 걸어도'의 차가운 한 장면 때문에 이 영화를 잊지 못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따뜻함의 대명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의 따뜻함은 갈구함에서 나온다고 느끼거든요. '걸어도 걸어도'는 큰 아들을 사고로 잃고 살아가는 한 가족이 나옵니다. 큰 아들의 기일이 영화의 주요 시간적 배경인데요.


큰 아들은 누군가를 살리려다 죽었고, 죽은 큰 아들 대신 살아난 동네 청년은 기일마다 이 가족을 찾습니다. 기일에 이 가족을 찾아온 이 청년의 얼굴은 죄책감으로 다소 어둡습니다.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다른 가족들은 좀 불편하기도 합니다.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더 이상 기일에 찾아오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가족 중 한 명이 이야기하는데, 엄마(돌아가신 키키 기린이 분했어요)의 얼굴이 돌연 차가와집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 아이도 그 정도는 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는 뉘앙스로 기억해요. 저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여러 감정들 가운데 이런 감정들에 크게 흔들려요.  아름답고 말랑하기보다 차갑고 모가 난 것들. 이다혜 기자는 '걸어도 걸어도'의 첫 장면, 화면이 아직 나오기도 전에 음식을 만들면서 여자들이 하는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의 집밥 신화가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무급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엌이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위험하고 시끄러운 공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환상의 빛' 부엌 장면을 울 자리를 찾지 못하는 여성들의 우는 소리로 느끼는 부분도 그렇고요. 저는 잊을 수 없는 부엌 장면으로 '밀양'을 떠올려요. 아이를 잃고 부엌에 서서 밥 먹던 엄마의 뒷모습. 어쩌면 여자들에게 부엌은 그런 공간이었던 거 아닐까?


이 글을 읽고 나니 여성들, 특히 살림하는 여성들이 나오는 영화의 부엌 장면들을 유심히 보고 싶어졌어요. 이다혜 기자는 '가족이라는 소음'이라는 이 장을 이렇게 맺습니다. "영화에서 음식, 요리, 식사 장면은 여러 방식으로 등장하고, 여러 맥락에 놓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자기 집 부엌에 선 여자들의 표정과 뉘앙스를 잡아내는 데 뛰어나다. 귀로는 맛있는 것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듣지만, 눈으로는 손이 아닌 배우의 얼굴을, 등을, 식탁에 앉은 가족의 표정을 살핀다. 부엌은 그렇게 포만감과 행복, 그리움과 슬픔의 공간이 된다." (p.67) 저처럼 갱년기의 우울과 의욕 저하를 겪고 계신 분이라면 한 번 읽으면서 우리가 늘상 느끼고 보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보는 힌트를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늙음이 가진 '경이의 상실' 같은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