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은주 지음, 생각의힘, 2026
아직 올해가 끝나지 않았지만 제가 꼽은 올해의 책은 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이 더 널리,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사회학자인 저자 조은주는 학생들과 교사, 학부모들을 20년 넘게 인터뷰하고 현장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지금 이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어른으로 키우는 데 실패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이야기는 '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000년대 이후 교육현장은 학생들이 수동적으로 교육현장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향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진보든, 보수든 정치 진영에 상관없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한 자유 학기제가 문재인 정부의 자유 학년제로 확대되고 사회는 그것이 추호의 의심 없는 맞는 방향이라는 데 입을 모았죠.
그게 왜 문제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래를 의미 생성의 원천으로 여기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그에 조응하여 현실적 실천의 방향과 지향을 설정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특정한 사회적 조건을 전제한다. 꿈은 인간의 삶에서 결코 보편적인 요소가 아니다"(42쪽) 저는 이 '꿈'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걸 저희 가게에서 일하는 남미 청년들을 보면서 처음 깨닫게 되었는데요. 우리 식대로 가게에서 연말에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던 때의 일입니다. 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이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여기까지 온 이 친구들에게도 어떤 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슨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거창한 꿈은 아니어도 하다 못해 식당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내 식당을 경영하겠다는 꿈, 요리 실력을 갈고 닦아 돈도 더 많이 받는 전문적인 요리사가 되겠다는 것 같은. 하지만 이 친구들은 하나같이 "꿈이 뭐냐?"는 제 질문이 어리둥절한 듯 보였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한다, 나보다 다음 세대는 더 나아져야 한다는 뿌리 깊은 한국적 사고 방식에 젖어있던 제게는 좀 충격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중학생쯤 되어보이는 어린 아들과 아빠가 같은 일을 하고 와서 우리 가게에서 밥을 먹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 부모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일을 하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엄마 아빠가 하는 일을 거들려고 하면 들어가 공부나 하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중국집 배달원이 "내가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 같냐"며 손님에게 큰 소리를 치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개천의 용'이 나던 시절의 유산일까요? 어제의 배달원이 내일의 권력자나 부자, 혹은 지식인이 될 수도 있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으니까요. 저자는 지금 아이들 세대와 그 부모 세대의 삶을 비교합니다. 인터뷰 대상이 된 아이들의 학군과 경제적 계층은 비교적 다양하지만 눈에 띄는 이들은 비교적 척박한 환경의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의 부모 세대와 그 윗세대는 또 다릅니다. 농사가 주업이었던 시절에 수많은 형제자매들 틈에 태어나 자라며 제대로 교육도, 돌봄도 받지 못했던 부모세대들은 자신의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며 하나 혹은 둘만을 낳아 아이들을 돌봅니다.
그 아이들 중에는 비교적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지만 부모의 이혼으로 조손 가정의 일원으로 자란 아이들도 있고, 지속적인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아이들도 있지요. 이 아이들이 거의 12년을 보내는 공교육의 장에서 과연 무엇을 배우고 익힐까요? 가장이 생계를 책임지고 엄마는 자식을 돌보며 살림을 하는 전 세대의 모델은 깨진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그 세대를 모델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가족이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졌음에도 사회도, 교육현장도 그에 맞게 변하지 않은 틈에 아이들은 학교에서 분류의 질서를 익힙니다. 이른바 공교육의 발전은 근대 계몽주의가 낳은 역사적 진전입니다. 하지만 그 보편교육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테니스 비유를 많이 들고 있는데요. 테니스 코트에 입장하는 것이 평등한 권리로 주어졌다고 해서 평등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축구나 권투가 아닌 테니스인지, 왜 테니스에서 이겨야 하는지, 왜 테니스의 규칙이 그런지, 이긴 사람들 가운데서 왜 특정 인종만이 압도적으로 많은지 등은 묻지 않은 채 테니스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또 그 유명한 부르디외의 장과 아비튀스 이론이 등장합니다. 특히 특정한 장 안에서 작동하는 원리와 질서에 대한 체화된 감각인 아비튀스는 특정한 스포츠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테니스처럼 사회적 의례와 괴상한 규칙의 중요한 경기 같은 경우에는 더 그렇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테니스 실력만이 문제라고 하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은 등급에 따른 분류의 질서를 익힙니다. 더 무서운 것은 능력주의를 통해 아이들 스스로 그 불평등에 공모하고 그런 체제를 강화한다는 것입니다. 능력있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요. 뒷부분에 가면 인상적인 일화가 나옵니다. 소년원을 거쳐 수감생활까지 한 후 일수를 하며 살아가는 친구와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편의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한 사람의 삶을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초월적인 의지나 굳건한 다짐이 아니라 바로 그런 좋은 삶에 대한 찰나의 방향감각이라고요. 섬광처럼 지나가는 그 뱡향감각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가 중요하다고요.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말은 그 뒤에 나옵니다. 근대적 평등과 존엄은 인간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긍지와 명예를 희미하게 만듦으로써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어딘가에 속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에 새로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일까요? 단지 일자리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AI에 대한 논의로만 가득한 세상, 저는 이 책에서 던지는 인간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 사람이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더 오래, 많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