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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읽은 책]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2026-06-28 22:07
카테고리읽은책 읽을책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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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별 지음, 위고, 2025


어떤 책이 좋아서 영원히 아끼고 싶은 마음에 중간에 덮어버린 채 영원히 읽지 않게 되는 책이 있어요. 홍한별 작가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가 그런 책이었습니다. 전작들,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노지양 번역가와의 공저)를 즐겁게 읽었기 때문에 나오자마자 샀는데, 앞 두 장,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와 '바벨' 두 장을 읽고서 책을 덮어두었습니다. 이러다가 끝까지 못 읽겠다 싶어서 독서모임에 올해 읽을 추천책으로 올려두었습니다. 숙제는 잘 하는 모범생이라 나머지를 읽게 되었고 읽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이 책은 아그리파 석고상을 그리던 학창시절의 일화로 시작합니다. 하얀 아그리파를 그리기 위해 검은 연필로 계속 덧그려서 새까매진 도화지를 앞두고 그것이 마치 번역의 은유 같다고요.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투명함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죠. 하나는 원문의 빛을 가리지 않고 순수 언어를 매개로 그 빛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의미, 또 하나는 읽는 이가 이것이 애초에 자신의 모국어로 쓰인 것처럼 매끄럽게 받아들인다는 의미. 이 둘은 서로를 배척하기 때문에 번역가는 늘 아이러니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아이러니들을 여러 책과 번역가들을 매개로 숙고합니다. 모비딕,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와 70인역, 베니스의 상인 등의 책과 횔덜린이나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아르토 아르냉, 메리 시드니 허버트 등의 번역가들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게 번역을 잘하고 싶다는 안간힘과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예감 사이의 우아한 허둥거림 같습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한강 작가의 대표작을 번역해서 서구에 알리고 부커상 인터내셔널과 노벨상까지 이어지게 한 데버라 스미스의 오역 논쟁 부분이었어요. 번역의 도착어와 출발어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위계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 기울어진 권력이 오역 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번역은 때로 낯설게 하기도 하고 길들이기도 합니다. 제국주의 시절을 생각해보면 피지배 당사자는 지배자들을 이해해서 이기기 위해 그들의 문물과 문명을 부지런히 번역합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가는 번역을 할 때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데버라의 오역으로 지적되는 부분은 '채식주의자'의 영혜 남편의 가부장적 폭력성이 서구식으로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저희 독서모임 구성원 가운데 한 분은 한글본을 읽지 않고 영역본만 읽었는데도 그 가부장적 폭력성을 그대로 느꼈다는 거에요. 그 분께는 이미 한국적 가부장제의 폭력이라는 게 문화적 맥락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었던 거에요.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온 세월과 함께요.


그러니 번역의 불완전성에는 수많은 겹이 있는 거에요. 단순히 이 언어를 같은 뜻의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 이 의미를 저 나라의 맥락에서 같은 의미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그 언어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맥락들이 간섭을 일으키기도 하고요.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와 권력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가끔씩 미국에서는 이런 영어를 쓰지 않는다는 식의 영어공부 팁을 만납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례한 것이고, 이런 단어 대신 저런 단어를 쓴다는 식의. 그런 걸 볼 때마다 우리 가게에 찾아오는 수많은 이민자 손님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적어도 우리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문화적 맥락이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거든요. 우리는 이상한 단어를 쓰더라도, 부러진 영어를 쓰더라도, 무례하다는 뉘앙스 따위는 상관없이 뜻만 전달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부정확한(?) 언어라도 활발하게 오고 가는 건 분명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거에요. (요즘 세상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불가능한 줄 알지만 포기하지 않고 애쓰는 것. 단지 번역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세계가 실시간으로 통하고 모든 언어가 바로 번역되는 세상이라지만 어느 때보다 불통한다는 기분이 드는 요즘,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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